동명신화 부여의 역사, '후한서' '동이전' 내용
동명신화 부여의 역사, '후한서' '동이전' 내용
우린 흔히 '부여'를 고조선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쯤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역사상 부여라는 이름이 출현된 것은 고조선 당시의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고조선과 함께 중국측의 기록에 실려 있다는 것 만으로도 부여의 국가적 성격을 확인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다만, 서기 1세기경에 이미 부여에서 왕호를 사용하였으며, 중국과의 외교도 맺었다는 사실을 참고해 본다면 부여의 국가 형성은 보기보다 더욱 이른 시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부여를 건국한 사람은 '동명'이라고 하는데 그의 건국 과정에 대한 신화는 "후한서" '동이전'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 옛날 북쪽 색리국의 국왕이 출장을 나가 있었는데 그 시녀가 임신을 했다
왕이 돌아와 시녀를 죽이려 하니, 시녀가 말하기를 "전에 하늘에서 이상한 기운이 일더니 계란 크기만한 것이 저에게 내려온 적이 있는데, 그 뒤로 임신을 하게 된 것이다
라고 했다, 왕이 시녀를 죽이지 않고 가두어 두매, 나중에 드디어 사내아이를 낳게 된다
왕이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려두게 했지만 돼지들이 입김을 불며 보호해 죽지 않았다.
마구간에 버리자 만들도 역시 그렇게 살려 두었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어미가 기를 것을 허락하고, 아이의 이름을 동명이라 지었다
동명은 커서 활을 잘 쏘았다. 왕은 그가 용맹해지는 것을 염려해 다시 죽이려 했는데 동명은 달아나게 된다.
남쪽으로 가다가 엄호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모여 동명을 건네주었다, 마침내 부여에 와서 왕노릇을 하게 된다 |
위 내용의 신화에서 하늘의 이상한 기운이란 곧 해 또는 햇빛에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는데 대체로 몽고와 만주 지역에 널리 퍼져있는 설화들 중에서는 햇빛에 감응되어 임신, 출산했다는 내용의 신화가 많기 때문이다, 모두 주인공의 비범함을 내세우기 위한 과장된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
동명이 물고기의 도움을 받아 건넜다는 엄호수는 지금의 송화강이라고 하는데 따라서 동명은 송화강의 북쪽에 살던 사람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신화속의 개인은 종종 집단을 대표하기도 한다, 그것은 이미 단군신화를 통해 확인한바 있으며 그렇다면 동명의 남하는 동명집단 또는 동명의 후예를 자처하는 집단의 남하로 바꾸어 볼 수 도 있다
왕이 주이려 하자 남하했다는 내용으로 보면 북방의 어떤 세력 또는 집단에 밀려 송화강을 건너 남하한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보게 된다.
동명이 부여를 건국한 곳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신황에 아무런 언급도 없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중국 길림성의 길림시 일원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특히 서단산과 동단산 일대에서는 석관묘, 토광묘, 옹관묘 등의 고분과 산성유적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서단산 문화유적에서 발견된 유물로는 비파형 동검과 같은 정동제 무기류와 반월형 석도 그리고 조기장등의 추위에 강한 곡물을 볼 수 있다
농업과 목축의 증거일 것이다
방사선탄소연대측정법으로 연대를 측정해 본 결과 서단산문화의 후석산 유적에서는 서기전 100~100년, 장사산 유적에서는 서기전 405~85년이라는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동단산 문화의 남성자 유적 인근을 부여의 왕성지로 보기도 한다
부여가 처음부터 끝까지 길림시 인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모용씨가 침입하는 서기 3세기 후반에 이르면, 부여가 분열하면서 일부 세력이 두만강 유역으로 옮겨가 또 하나의 국가를 세우게 되는데, 이것을 동부여라 한다
그리고 4세기 초에 이르면 원래의 부여 역시 서쪽의 농안, 장춘 방면으로 이동하게 된다
고구려의 영향권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우린 흔히 '부여'를 고조선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쯤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역사상 부여라는 이름이 출현된 것은 고조선 당시의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고조선과 함께 중국측의 기록에 실려 있다는 것 만으로도 부여의 국가적 성격을 확인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다만, 서기 1세기경에 이미 부여에서 왕호를 사용하였으며, 중국과의 외교도 맺었다는 사실을 참고해 본다면 부여의 국가 형성은 보기보다 더욱 이른 시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부여를 건국한 사람은 '동명'이라고 하는데 그의 건국 과정에 대한 신화는 "후한서" '동이전'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 옛날 북쪽 색리국의 국왕이 출장을 나가 있었는데 그 시녀가 임신을 했다
왕이 돌아와 시녀를 죽이려 하니, 시녀가 말하기를 "전에 하늘에서 이상한 기운이 일더니 계란 크기만한 것이 저에게 내려온 적이 있는데, 그 뒤로 임신을 하게 된 것이다
라고 했다, 왕이 시녀를 죽이지 않고 가두어 두매, 나중에 드디어 사내아이를 낳게 된다
왕이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려두게 했지만 돼지들이 입김을 불며 보호해 죽지 않았다.
마구간에 버리자 만들도 역시 그렇게 살려 두었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어미가 기를 것을 허락하고, 아이의 이름을 동명이라 지었다
동명은 커서 활을 잘 쏘았다. 왕은 그가 용맹해지는 것을 염려해 다시 죽이려 했는데 동명은 달아나게 된다.
남쪽으로 가다가 엄호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모여 동명을 건네주었다, 마침내 부여에 와서 왕노릇을 하게 된다 |
위 내용의 신화에서 하늘의 이상한 기운이란 곧 해 또는 햇빛에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는데 대체로 몽고와 만주 지역에 널리 퍼져있는 설화들 중에서는 햇빛에 감응되어 임신, 출산했다는 내용의 신화가 많기 때문이다, 모두 주인공의 비범함을 내세우기 위한 과장된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
동명이 물고기의 도움을 받아 건넜다는 엄호수는 지금의 송화강이라고 하는데 따라서 동명은 송화강의 북쪽에 살던 사람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신화속의 개인은 종종 집단을 대표하기도 한다, 그것은 이미 단군신화를 통해 확인한바 있으며 그렇다면 동명의 남하는 동명집단 또는 동명의 후예를 자처하는 집단의 남하로 바꾸어 볼 수 도 있다
왕이 주이려 하자 남하했다는 내용으로 보면 북방의 어떤 세력 또는 집단에 밀려 송화강을 건너 남하한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보게 된다.
동명이 부여를 건국한 곳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신황에 아무런 언급도 없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중국 길림성의 길림시 일원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특히 서단산과 동단산 일대에서는 석관묘, 토광묘, 옹관묘 등의 고분과 산성유적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서단산 문화유적에서 발견된 유물로는 비파형 동검과 같은 정동제 무기류와 반월형 석도 그리고 조기장등의 추위에 강한 곡물을 볼 수 있다
농업과 목축의 증거일 것이다
방사선탄소연대측정법으로 연대를 측정해 본 결과 서단산문화의 후석산 유적에서는 서기전 100~100년, 장사산 유적에서는 서기전 405~85년이라는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동단산 문화의 남성자 유적 인근을 부여의 왕성지로 보기도 한다
부여가 처음부터 끝까지 길림시 인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모용씨가 침입하는 서기 3세기 후반에 이르면, 부여가 분열하면서 일부 세력이 두만강 유역으로 옮겨가 또 하나의 국가를 세우게 되는데, 이것을 동부여라 한다
그리고 4세기 초에 이르면 원래의 부여 역시 서쪽의 농안, 장춘 방면으로 이동하게 된다
고구려의 영향권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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