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뜻과 유래

고사성어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뜻과 유래




'조그만 쇠붙이로 사람을 죽인다'는 뜻으로 간단하지만 핵심을 찌르는 말 한마디로 남을 감동시키거나 약점을 찌를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이 말은 남송의 유학자 나대경(羅大經)이 지은 <학림옥로(鶴林玉露)>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학림옥로>는 주희(朱熹), 구양수(歐陽脩), 소식(蘇軾) 등의 어록과 시화, 평론을 모으고, 그의 집에 찾아온 손님들과 주고받은 청담(淸談)을 기록한 것인데, 그중 종고선사가 선(禪)에 대해 논한 대목에 '촌철살인(寸鐵殺人)'이라는 말이 나온다.

"어떤 사람이 한 수레의 무기를 싣고 왔다고 해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한치도 안 되는 칼만 있어도 곧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이 말은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속된 생각을 없애기 위해 성급히 이런저런 방법을 쓰겠지만 정신의 집중이 부족하기 때문에 모두 서툰 수작일 뿐이다.
모든 일에 대해 온몸과 온 영혼을 기울일 때 충격적으로 번뜩이는 것.
이것이야말로 큰 깨달음이라는 것이 이 고사성어의 가르침이다.



후삼국을 통일하고 한반도를 차지한 고려는 나라의 기틀을 다져 나갔다.
그 당시 고려의 북쪽 만주 지역에서는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요나라를 세워 세력을 키우고 있었고, 중국 땅에는 조광윤이 송나라를 세워 서로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고려의 태조 왕건은 중국의 여러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어 친하게 지냈지만,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하자 거란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942년에 거란의 황제는 중국 대륙을 침략할 계획으로 고려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사신과 낙타 수십마리를 선물로 보내왔다. 하지만 태조 왕건은 낙타를 개경의 만부교 다리 밑에 묶어놓아 굶겨 죽이고, 사신은 섬으로 귀양보냈다.
그는 거란을  '짐승과 같은 나라'라고 일컬으며 가까이 지내지 말것을 당부했다.

송나라가 건국되자 고려의 광종은 송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이고 나라의 기틀을 단단히 다지려는 생각에 친송정책을 펼쳐 나갔고, 송나라 역시 고려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거란을 견제하려 했다.

993년, 거란은 송나라를 치기 전 송나라를 도울만한 나라들을 먼저 없애기로 마음먹고,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쳐들어왔다.
압록강을 넘어 청천강 위쪽의 봉산을 빼앗은 거란은 싸움을 멈추고 고려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항복조건은 고려가 차지하고 있는 고구려의 옛땅을 내놓을 것과 송과의 관계를 끊고 자신들과 교류할 것! 이 두가지였다.

이에 거란과 맞서 싸울 자신이 없었던 고려 조정은 혼란에 휩싸여 거란에게 무조건 항복하든가, 옛 고구려의 영토인 서경 이북 땅을 내주어 거란을 물러가게 하자고 주장했다. 결국 성종은 서경 이북 땅을 내주자는 신하들의 주장을 따르기로 결심했는데, 이때 서희(徐熙)가 다른 주장을 하고 나왔다.

"선왕이신 광종께서는 가주와 송성에 있던 여진을 내쫒고 그곳에 성을 쌓으셨습니다. 지금 거란이 침입한 것은 두 성을 차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옛 땅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우리 고려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들이 거느린 군사들의 수가 많다고 해서 선뜻 영토를 내주어서는 안됩니다.
제가 직접 거란의 장수 소손녕을 만나 담판을 짓고 오겠습니다."
서희(徐熙)의 이러한 주장에 이지백이 동조하자 성종도 마음을 돌렸다.

서희(徐熙)가 소손녕과 협상을 하기 위해 거란의 진영으로 찾아가자, 소손녕은 뜰안에서 절을 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서희(徐熙)는 왕을 대할 때만 절을 올리는 것이므로 신하들끼리 만나는 자리에서는 절을 할 수 없다며 소손녕의 요구를 거절했다.





결국 소손녕과 서희(徐熙)는 대등한 지위에서 협상을 벌였다.
소손녕이 옛 고구려 땅은 거란의 땅이라고 우기자 서희가 이렇게 따졌다.
"나라 이름을 보면 알다시피 고려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나라요. 그래서 고구려의 옛 도읍인 평양을 고려의 도읍으로 삼은 것이오. 오히려 거란이 옛 고구려 땅에 살고 있으니 그 땅을 우리 고려에 돌려주는 것이 맞소."
사실 당시 고려의 도읍은 개경이었으나 평양을 제2의 도읍인 서경으로 삼았으니 서희(徐熙)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이에 소손녕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고려는 왜 가까이 있는 우리 거란은 멀리하고 바다 건너 송나라와 가깝게 지내는 것이오?"
"그것은 압록강 주변에 있는 여진이 우리가 거란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오. 당신들이 압록강에서 여진을 몰아내 준다면 고려는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당신들과 교류할 것이오."

소손녕은 서희(徐熙)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여 그의 주장을 거란의 황제에게 전했다. 거란은 고려가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는 대신, 거란으로 가는 길목인 압록강 동쪽의 280리를 고려에게 내주기로 하고 군대를 철수시켰고, 고려에서는
강동6주를 설치해 이곳을 고려의 땅으로 편입시켰다.

서희(徐熙)는 많은 희생이 따르는 싸움을 하지 않고도 짧은 말로써 거란을 물러나게 했다. 서희의 말이 바로 촌철살인(寸鐵殺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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