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디 라마르(Hedy Lamarr_1914.11.9~2000.1.19) 오스트리아 출신의 여배우

 헤디 라마르(Hedy Lamarr_1914.11.9~2000.1.19) 오스트리아 출신의 여배우







헤디 라마르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여배우이다.
2014년이 탄생 100주년이었는데 당시 영화계보다 과학계가 더 떠들석했었다.
헤디 라마르는 20세기를 대표하는 미인이라는 타이틀 이외에 그녀를 더 돋보이게 하는 것은 위대한 과학적 발명을 한 과학자라는 것이다.
엄친딸이라는 단어는 그녀로부터 유래된 게 아닌가 싶다.
헤디 라마르는 오늘날 폭넓게 사용되고 있는 모바일폰의 중요한 요소인 스펙트럼 분산 통신기술을 작곡가인 조지 앤틸과 공동으로 개발했다.






라마르의 부모는 모두 유태 계통이었다.
라마르는 어린 시절에 피아노와 발레를 공부했다.
한때는 베를린에서 연극인인 막스 라인하르트와 함께 일하기도 했다.
라인하르트는 라마르를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불렀다.
얼마 후 아직도 10대 소녀인 라마르는 독일 영화에 주역으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1933년 라마르는 '엑스타시'란 체코영화에 출연하는데 그녀가 맡은 역은 나이 많은 남편의 무관심으로 사랑에 굶주려 몸부림치는 젊은 부인의 역할이었다.
1930년대라는 보수적인 시대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젊은 여인인 라마르는 오르가즘의 무아지경에 도달한 얼굴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었으며 숲속에서 누드로 달려가는 장면도 있다.
이로 인해 이 영화는 큰 논란에 휩싸였지만 반면에 라마르에 대한 인기는 높이 치솟았다.
그해 8월,라마르는 13년 연상인 무기제조업자인 프리드리히 만들과 결혼한다.
큰 부자인 만들은 자신의 부인이 외설적이란 소리를 듣기 싫어서 영화 '엑스타시'의 필름을 모두 사들였다.
라마르가 나중에 쓴 그녀의 자서전에서 첫
남편인 만들을 '너무나 권위를 앞세우는 파시스트 같은 사람이고 외출하지 못하도록 집안에 가두어 놓았다'고 회상했다.







만들은 라마르가 더 이상 영화에 출연하지 못하게 했다
대신에 그는 라마르를 과학자들이나 기업가들의 모임에 데리고 다녔다.
라마르는 어릴 적부터 과학에 무척 관심이 많았고 특히 수학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남편 만들은 나치의 방위산업에 적극 관여했으며 그런 남편이 라마르는 무척이나 싫었고 결국은 1937년 하녀로 변장하고 파리로 도피한다.
남편 만들은 곧 추격을 시작했지만 말 그대로 영화처럼 그녀는 구사일생으로 파리에 안착한다.파리를 거쳐 런던으로 도피한 그녀는 곧 미국으로 향하고 헐리웃에 도착해서는 1938년 'Algier'란 영화를 찍는다.
그녀는 1940년부터 1949년까지 18편의 영화에 출연한다.
그녀의 한창 전성기인 이때 그녀는 이미 두 아이의 엄마였지만 아름다움은 전혀 퇴색되지 않았다.그녀의 최고 히트작은 1949년도 영화 '삼손과 데릴라'였다.








아방가르드 작곡가인 조지 앤틸은 라마르의 이웃이었다.
과학적 관심이 컸던 라마르는 앤틸과 비밀통신시스템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1941년 6월 라마르와 앤틸은 비밀통신시스템을 완성하고 특허를 출원한다.
이들이 개발한 주파수 호핑 기술은 비록 초기단계에 지나지 않았지만 피아노 공명을 이용하여 주파수를 변경하는 것이었다.
이 기술은 수중에서 발사된 무선유도의 어뢰를 적함이 주파수 혼돈을 일으켜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개발된 것으로 후에 실제로 잠수함에서 이용되었다.
이 기술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혁신적인 것이었다.
오늘날 모바일폰의 분산 스펙트럼 통신기술은 라마르와 앤틸이 개발한 기술에 기본을 둔 것이다.
우리가 요긴하게 쓰고 있는 CDMA나 블루투스,Wi-Fi 등도 이 기술에 기반을 둔 것이다

1940년대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던 그녀는 44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영화계를 떠난다.
평생 6번의 결혼을 했던 그녀는 2000년 1월19일,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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