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6.25)로 본 일본의 특수
한국전쟁(6.25)로 본 일본의 특수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 이후 일본을 간접통치하던 맥아더사령부는 일본 사회에 여러 민주화 조치를 취하는데 경제분야에 있어서도 민주화 조치가 취해져서 자유로운 시장경제가 활성화되길 기대했지만 1930년대 이후 일본의 국가사회주의 형태의 경제정책
(모든 경제분야를 정부가 간섭하고 통제하는)에 길들여진 일본 경제는 좀처럼 회복을 못하고 1949년 무렵에는 극심한 불황을 맞는다.
더구나 그 당시 일본 사회에는 공산주의 사상이 사회 여러 분야,특히 노동계,에 침투해 있었고 중국대륙에서의 공산정권의 탄생은 맥아더 사령부로 하여금 더 이상 일본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커지지 못하도록 뿌리를 잘라내는 조치를 취하게 한다.
극심한 불황으로 인한 대량해고,사회 전 분야에서의 공산주의자 색출과 그들의 퇴출 등으로 1950년의 일본은 혼란의 절정기에 있을 때이다.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일본에는 미군 4개 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급히 한국으로 가게되면서 일본의 치안과 방위를 미국이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이 닥친다.
이러자 맥아더사령부는 일본 정부에 너희들 치안과 방위를 스스로 담당할 조직을 만들라는 지시를 한다.
이래서 만들어진 조직이 경찰예비대
이는 후에 자위대로 명칭이 바뀌면서 조직이 커진다.
한국전에 참전하는 미군과 UN군의 병력수가 늘어나면서 일본은 한국전을 위한 군수기지가 되어 무기와 군수품의 생산,수송을 위해 공장,선박,철도가 총동원되고 일본은 한국에 투입되는 유엔군의 훈련장이 되었다.
1952년까지 일본엔 2500개소의 각종 미군 시설이 들어섰다.
육해공군을 위한 훈련장, 특수전 학교, 사격장, 병원, 휴양소, 항만시설, 무기고, 공병 시설 등등 건설 붐이 불었다.
1947년에 맥아더는 先見之明이 있는 조치를 취하였다. 작전 명은 롤업(Roll-up). 태평양 전쟁 때 중앙 및 남서 태평양 전선에 버려진 무기 및 장비들을 회수하여 수리하는 일이었다. 한국전이 나자 이 무기들이 전선에 투입되었다.
무기 및 장비들을 수리하는 일감이 일본 회사에 넘어갔다. 한국전 초기 넉 달 동안 일본 회사 등은 48만9000정의 小火器, 1418문의 대포, 3만4316개의 통제장비, 743대의 전투 차량, 1만5000대의 일반 차량을 출고시켰다.
전쟁에는 군수분야에 많은 인력이 투입된다. 맥아더 사령관은 이런 일을 주로 일본 인력에 맡겼다.
일본 人力을 사용할 수 없었더라면 미군은 약 20만~25만 명의 추가 병력이 필요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일본의 해상보안청 소속 기뢰제거 기술자 등은 유엔군이 북진할 때 한국전선에 투입되었다. 일본의 해운 철도 기술자들도 유엔군 소속으로 한국에서 활동하였다.
맥아더는 한국전이 시작되자 일본주둔 군수사령부를 창설하였다. 한국전선에 필요한 물자를 일본에서 조달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회사와 계약한 구매 액수는, 1950년에 1억8400만 달러, 1952년엔 8억2400만 달러, 1953년엔 8억600만 달러에 이르렀다. 당시 일본의 수출액은 10억 달러 수준이었다.
미국은 미군과 한국군, 그리고 다른 연합군을 위한 무기 및 장비뿐 아니라 한국인을 위한 구호물자도 일본에서 구매하였다. 이런 자금은 미국 정부와 원조기관에서 나왔다. 특별자금으로 구매된 물자의 액수는 1950~55년 사이 17억 달러에 달하였다
시멘트, 비료, 종이 등도 날개 돋친듯 팔려나가 ‘삼백(三白) 경기’라고 불렸다. 건축용 철재를 비롯하여 철사류, 모래주머니와 각종 트럭류 및 칫솔과 비누까지 값은 묻지도 않고 맥아더 사령부에서 구입해 갔다
토요다 자동차는 1950년 6월엔 304대의 트럭을 생산하였다. 한국전이 터지고 군수용 주문이 쇄도하여 1951년 3월이 되자 매달 1500대씩 만들었다.
SONY는 도쿄통신연구소 이름으로 단파 수신기 부속품을 만드는 보잘것 없는 영세 기업이었다. 이 무렵 도쿄통신공업으로 이름을 바꿔 녹음기용 릴 테이프를 만들고 있다가 6·25로 전파 탐지기 수요가 폭발하여 매상고와 이익금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미군의 특별자금 구매액의 약 10%는 일본이 생산하는 무기, 탄약, 장비를 사는 데 쓰였다. 이는 일본 무기 산업의 부활을 촉진하였다. 극동사령부는 태평양 전쟁에 동원되었던 약1000개의 군수제조업체를 폐쇄시켰는데, 한국전이 일어나자 생산을 재개하도록 하였다. 1950년 8월 미국 합참은 "만약 세계 전쟁이 일어난다면 일본의 군수산업 능력을 미국이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정하였다.
전쟁물자 생산 이외의 분야에서도 일본은 돈을 많이 벌었다. 일본으로 온 유엔군 소속의 군인들이 다양한 목적으로 돈을 썼다. 이들이 개인적 목적으로 쓴 돈은 하루 평균 100만 달러에 이르기도 하였다. 요코스카엔 일본 매춘부가 1500명으로 늘었다.
한국전쟁 특수로 인해 일본 사회의 극심한 불황과 혼란은 단번에 해결됐고 일본 경제는 1952년에는 2차대전 전의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후에 일본의 어느 잡지에서 스스로 언급했듯이 "전 인류 역사상 타인의 불행으로 완벽하게 행복해진 예는 한국전쟁 외에는 없었다"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 이후 일본을 간접통치하던 맥아더사령부는 일본 사회에 여러 민주화 조치를 취하는데 경제분야에 있어서도 민주화 조치가 취해져서 자유로운 시장경제가 활성화되길 기대했지만 1930년대 이후 일본의 국가사회주의 형태의 경제정책
(모든 경제분야를 정부가 간섭하고 통제하는)에 길들여진 일본 경제는 좀처럼 회복을 못하고 1949년 무렵에는 극심한 불황을 맞는다.
더구나 그 당시 일본 사회에는 공산주의 사상이 사회 여러 분야,특히 노동계,에 침투해 있었고 중국대륙에서의 공산정권의 탄생은 맥아더 사령부로 하여금 더 이상 일본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커지지 못하도록 뿌리를 잘라내는 조치를 취하게 한다.
극심한 불황으로 인한 대량해고,사회 전 분야에서의 공산주의자 색출과 그들의 퇴출 등으로 1950년의 일본은 혼란의 절정기에 있을 때이다.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일본에는 미군 4개 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급히 한국으로 가게되면서 일본의 치안과 방위를 미국이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이 닥친다.
이러자 맥아더사령부는 일본 정부에 너희들 치안과 방위를 스스로 담당할 조직을 만들라는 지시를 한다.
이래서 만들어진 조직이 경찰예비대
이는 후에 자위대로 명칭이 바뀌면서 조직이 커진다.
한국전에 참전하는 미군과 UN군의 병력수가 늘어나면서 일본은 한국전을 위한 군수기지가 되어 무기와 군수품의 생산,수송을 위해 공장,선박,철도가 총동원되고 일본은 한국에 투입되는 유엔군의 훈련장이 되었다.
1952년까지 일본엔 2500개소의 각종 미군 시설이 들어섰다.
육해공군을 위한 훈련장, 특수전 학교, 사격장, 병원, 휴양소, 항만시설, 무기고, 공병 시설 등등 건설 붐이 불었다.
1947년에 맥아더는 先見之明이 있는 조치를 취하였다. 작전 명은 롤업(Roll-up). 태평양 전쟁 때 중앙 및 남서 태평양 전선에 버려진 무기 및 장비들을 회수하여 수리하는 일이었다. 한국전이 나자 이 무기들이 전선에 투입되었다.
무기 및 장비들을 수리하는 일감이 일본 회사에 넘어갔다. 한국전 초기 넉 달 동안 일본 회사 등은 48만9000정의 小火器, 1418문의 대포, 3만4316개의 통제장비, 743대의 전투 차량, 1만5000대의 일반 차량을 출고시켰다.
전쟁에는 군수분야에 많은 인력이 투입된다. 맥아더 사령관은 이런 일을 주로 일본 인력에 맡겼다.
일본 人力을 사용할 수 없었더라면 미군은 약 20만~25만 명의 추가 병력이 필요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일본의 해상보안청 소속 기뢰제거 기술자 등은 유엔군이 북진할 때 한국전선에 투입되었다. 일본의 해운 철도 기술자들도 유엔군 소속으로 한국에서 활동하였다.
맥아더는 한국전이 시작되자 일본주둔 군수사령부를 창설하였다. 한국전선에 필요한 물자를 일본에서 조달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회사와 계약한 구매 액수는, 1950년에 1억8400만 달러, 1952년엔 8억2400만 달러, 1953년엔 8억600만 달러에 이르렀다. 당시 일본의 수출액은 10억 달러 수준이었다.
미국은 미군과 한국군, 그리고 다른 연합군을 위한 무기 및 장비뿐 아니라 한국인을 위한 구호물자도 일본에서 구매하였다. 이런 자금은 미국 정부와 원조기관에서 나왔다. 특별자금으로 구매된 물자의 액수는 1950~55년 사이 17억 달러에 달하였다
시멘트, 비료, 종이 등도 날개 돋친듯 팔려나가 ‘삼백(三白) 경기’라고 불렸다. 건축용 철재를 비롯하여 철사류, 모래주머니와 각종 트럭류 및 칫솔과 비누까지 값은 묻지도 않고 맥아더 사령부에서 구입해 갔다
토요다 자동차는 1950년 6월엔 304대의 트럭을 생산하였다. 한국전이 터지고 군수용 주문이 쇄도하여 1951년 3월이 되자 매달 1500대씩 만들었다.
SONY는 도쿄통신연구소 이름으로 단파 수신기 부속품을 만드는 보잘것 없는 영세 기업이었다. 이 무렵 도쿄통신공업으로 이름을 바꿔 녹음기용 릴 테이프를 만들고 있다가 6·25로 전파 탐지기 수요가 폭발하여 매상고와 이익금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미군의 특별자금 구매액의 약 10%는 일본이 생산하는 무기, 탄약, 장비를 사는 데 쓰였다. 이는 일본 무기 산업의 부활을 촉진하였다. 극동사령부는 태평양 전쟁에 동원되었던 약1000개의 군수제조업체를 폐쇄시켰는데, 한국전이 일어나자 생산을 재개하도록 하였다. 1950년 8월 미국 합참은 "만약 세계 전쟁이 일어난다면 일본의 군수산업 능력을 미국이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정하였다.
전쟁물자 생산 이외의 분야에서도 일본은 돈을 많이 벌었다. 일본으로 온 유엔군 소속의 군인들이 다양한 목적으로 돈을 썼다. 이들이 개인적 목적으로 쓴 돈은 하루 평균 100만 달러에 이르기도 하였다. 요코스카엔 일본 매춘부가 1500명으로 늘었다.
한국전쟁 특수로 인해 일본 사회의 극심한 불황과 혼란은 단번에 해결됐고 일본 경제는 1952년에는 2차대전 전의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후에 일본의 어느 잡지에서 스스로 언급했듯이 "전 인류 역사상 타인의 불행으로 완벽하게 행복해진 예는 한국전쟁 외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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